고민의 시간
언제부터인가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성격이 되어서 밤이 되면 종종 고민 상담 전화가 오곤 한다. 대개 그런 전화는 밑도 끝도 없이 길어지기 마련인데, 나는 주로 방청객 리액션 보다는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이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넣을 때 판소리의 고수마냥 들어가야 할 타이밍에만 맞장구를 쳐준다.
하지만 이야기가 길어져도 딱히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고민의 내용은 대개 A B C 혹은 A B안을 정해놓고 결정장애 상태에 놓였을 때인데, 그나마 그 A B C 혹은 A B도 이미 결론이 정해진 상태에서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근거 혹은 용기를 얻기 위해 연락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 긴 시간을 뭐하러 이야기를 들어주냐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주인공으로 공감해주는 것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 정도가 되어서, 주인공이 원하는 길로 복선을 깔아주며 온전히 자신만이 그 길 위에 서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점집을 가본 일은 없지만, 전화 통화를 한 사람들 모두는 마치 점집에서 용한 도사님이 결론을 내준 것 마냥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사실 상황이 나아진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는데 말이다. 내 귀중한 시간을 내주었으니 복채라도 받아야 하나 싶지만, 좋은 일은 언젠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생각에 그냥 흘려보낸다.
사람도 다르고, 고민의 내용도 다르지만, 나도, 그들도, 매일 고민한다. 고민 없는 사람은 없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부의 정도를 떠나서 말이다.
하지만, 때로는 한 가지 고민에 사로잡혀 하루 종일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얼마전에 걸려온 전화가 이런 경우였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고민의 연속. 작은 고민이 눈덩이 처럼 불어나 어느덧 산 정도의 크기가 되었을 때야 도움을 요청했다.
이 사람에게는 '고민의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하루 종일 고민에 사로잡혀 관계마저 그르치는 삶이 아닌, 온전히 '고민만을 위한 시간' 말이다.
처음부터 될 리는 없지만 하루에 30분 안쪽으로 자신의 고민과 온전히 마주하는 시간을 정해두고 다른 시간에는 고민거리가 생각나도 '고민 시간'까지 미뤄두는 습관을 가지면, 자신을 좀 더 솔직히 볼 수 있게 된다. 쓸데 없는 잡 고민들이 줄어듦도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이다.
처음에는 30분 정도로 될까 싶지만 하다보면 오히려 고민의 시간이 줄어든다. 매일 겪는 각자의 고민 토픽은 일정하고, 그 일정함에 합당한 근거만 만들어 주면 되는 것이기에,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줄여나가는 '고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모든 고민이 이런 식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매일의 삶을 고민과 우울, 불안으로 채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작은 습관을 들여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도록 노력해보자.
<고민의 시간> - 고래